뉴욕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 연극(Broadway theatre)은 미국 뉴욕 맨해튼 씨어터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500석 이상의 좌석을 갖춘 40개의 대형 연극 극장(또 링컨 센터에 있는 1개의 극장까지)에서 상연되는 연극 공연을 뜻한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런던의 웨스트엔드 연극과 더불어 브로드웨이 연극을 상업 연극의 가장 높은 단계로 보고 있다.
브로드웨이 씨어터 디스트릭트는 뉴욕 시에 위치한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브로드웨이 리그에 따르면, 2007~2008년 시즌 동안 판매된 브로드웨이 연극 표는 93억 7천만 달러 어치에 달한다
역사
뉴욕에는 유명한 극장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1750년 배우 겸 매니저인 월터 머레이와 토마스 킨이 나소 스트리트에 28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극장을 처음으로 세웠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오페라 같은 발라드 오페라를 상연했다. 1752년 윌리엄 할람 (William Hallam)이 이끌던 영국 배우 12명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미국 (당시 영국의 식민지)에 순회 공연을 온다. 이들은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에 극장을 하나 세우고 베니스의 상인, 해부학자 (Anatomist) 같은 연극을 상연한다. 할람의 극단은 1753년 여름 뉴욕으로 온다. 다몬과 필리다 (Damon and Phillida) 같은 발라드 오페라나 광대극을 공연한다.
미국 독립 전쟁 때문에 뉴욕 극장계는 잠시 침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활동기를 맞는다. 1798년에는 2000석을 보유한 파크 극장이 채텀 스트리트 (현재 파크 로우)에 세운다. 1826년에는 바워리 극장이 개장한다. 곧 다른 극장들도 뒤를 이어 개장한다.
1829년 브로드웨이와 프린스 거리에 니블로스 가든 (Niblo's Garden)이 문을 연다. 이곳은 뉴욕의 유명한 야간 명소가 되었다. 좌석이 3000석인 이 극장은 뮤지컬 & 비뮤지컬 연극을 상연한다.
1830년대 흑인 분장을 한 미국 고유 형태의 연극 블랙페이스 민스트럴 쇼 (Blackface minstrel shows)가 인기를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40년대에 버지니아 민스트럴 극단이 나타나면서 더욱 인기가 치솟는다.
미국의 하원의원, 엔터테이너, 기업인인 피어니스 데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1810.7.5.~ 1891.4.7.)이 이 무렵 뉴욕 맨해튼의 박물관을 인수해 아넘 아메리카 박물관으로 바꾸고 그곳을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만든다.
애스터 플레이스 극장은 1847년에 문을 연다. 1849년에는 바워리 극장을 찾는 하층민들이 애스터 플레이스 극장의 상류 계급 관중들의 소위 속물 근성을 비난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애스터 플레이스 폭동 이후로 뉴욕 시의 연극은 계층에 따라 나뉜다. 오페라는 중상 혹은 상류층을 위한 것이었고, 민스트럴 쇼나 신파극 (멜로드라마)는 중류층을, 술집의 버라이어티 쇼는 노동자와 빈민가의 중류층을 위해 제작된다.
이 시기 브로드웨이 극장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공연된다. 햄릿 역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던 미국 배우 에드윈 부스 등이 유명했다. 부스는 1865년에는 윈터가든 극장에서 100여 개의 역을 연이어 맡았다. 당시 셰익스피어 연극 배우들로는 헨리 어빙, 토마소 살비니, 파니 데븐포트와 찰스 펙터 등이 있다. 부시의 동생 존 윌크스 부스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저격한 인물이다.
1968년 리디아 톰슨 (Lydia Thompson)은 조그만 연극단브리티쉬 블론즈 (British Blondes)를 데리고 미국에 건너온다. 뉴욕 중류층 관객들을 위해 유명한 영국 벌레스크 극을 선보인다. 톰슨의 극단은 1868~1869년 동안 뉴욕의 연극 무대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린다. 희극, 패러디, 풍자, 즉흥, 노래와 춤, 다양한 연기, 남장 및 여장, 화려한 무대 효과, 외설적인 농담들과 맵시있는 의상 - 영국 관객들에겐 이미 익숙한 이 요소들이 뉴욕에서는 폭풍이 되어 몰아친다. 그들의 투어는 6년간 흥행에 성공한다.
뮤지컬 탄생과 남북 전쟁
1850년대부터 뉴욕의 극장들은 점차 다운타운에서 미드타운으로 옮겨간다.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가격이 낮은 지역으로 옮겨 간 것이다. 브로드웨이의 중심부가 1870년 유니언 스퀘어에서 19세기가 끝날 무럽 매디슨 스퀘어로 옮겨간 것이다. 매디슨 스퀘어에 수많은 극장들이 세워진다. 이후 1920년대~1930년대에 타임즈 스퀘어 지역에 브로드웨이 극장들이 세워진다. 1957년 만들어진 <요정들 (The Elves)>이 첫 롱런 (장기흥행)한 뮤지컬은 50회 연속 상연한다. 당시 뉴욕의 뮤지컬 문화는 런던보다 뒤처져 있었다. 로라 킨느의 뮤지컬 벌레스크<일곱 자매 (Seven Sisters) (1860)>가 253회 연속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탄생에 서막을 알렸다.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이 총에 맞았던 극장에서 <우리의 미국인 사촌 (Our American Cousin)>의 공연했던 것도 킨느의 극단이었다.
현대 뮤지컬의 시조는 1866년 9월 12일 뉴욕에서 초연한 <검은 옷의 괴조 (The Black Crook)>이다. 5시간 반이나 되는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474회의 연속 공연이라는 기록을 수립했다. 그 해, 최초의 뮤지컬 코미디라 할 수 있는 <블랙 도미노/당신과 나 그리고 우체국 사이 (The Black Domino/Between You, Me and the Post))도 제작됐다
1881년 토니 파스터는 유니언 스퀘어 동쪽 블록에 첫 보드빌 극장을 세운다. 릴리언 러셀 등이 공연을 한다. 코미디언 에드워드 해리건과 토니 하트는 1878년에서 1885년 사이 <멀리건 가드 피크닉 (The Mulligan Guard Picnic)> 등의 뮤지컬을 제작하고 직접 출연한다. 대사와 가사는 해리건이, 음악은 그의 장인 데이빗 브라함이 담당한다. 뮤지컬 코미디에는 뉴욕의 하층민의 일상에서 따온 캐릭터와 상황들이 녹아있었다. 보드빌과 벌레스크가 좀 더 문학적인 형태로 다져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력에 대해 논란이 많았던 여성들을 무대에 올렸던 초기 뮤지컬과는 달리, 그들은 실력파 가수들 (릴리언 러셀, 비비안 세갈, 페이 템플턴)을 기용했다.
워싱턴DC는 행정도시가 되고, 뉴욕은 경제 도시가 된다. 교통이 발달한다. 가난이 해소된다. 가로등 덕분에 밤에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되면서 극장을 이용하는 고객의 수는 크게 늘어난다. 작품들의 길이가 길어도 관객들이 감상할 수 있었다. 이는 극단에 더 높은 이득, 그리고 제작비의 증가로 이어진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극장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여성들이 극장에 오는걸 꺼리게 만들었던 창녀들의 입장을 제한하기도 한다. 길버트-설리번의 가족적인 희가극은 1878년 <군함 피나포어 (H.M.S. Pinafore)>를 시작으로, 연극인과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들어온다. 레지날드 드 코븐의 <로빈 후드 (1891)>, 존 필립 수자의 <엘 카피탄 (1896)>등이 제작된다.
1891년 찰스 호이트의 <차이나타운으로의 여행 (A Trip to Chinatown)>은 657번의 연속공연을 한다. 브로드웨이 연극 흥행의 신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1919년 <아이린 (Irene)>에 와서야 깨진다. 1896년, 극장주 중 한 명이었던 마크 클라우와 A. L. 얼랜져는 공연조합 (Theatrical Syndicate)을 조직한다. 이후 16년 동안 미국의 거의 모든 극장을 통제한다. 소규모 보드빌과 버라이어티 쇼는 번성한다. 19세기가 끝날 때쯤 브로드웨이 연극들도 정립된다.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흑인이 모든 제작과 공연을 맡은 첫 작품은 <쿤타운으로의 여행 (A Trip to Coontown) (1898)>이었다. 이후 래그타임 스타일의 <케이크워크 춤의 시작 클로린디 (Clorindy the Origin of the Cakewalk) (1898)>이 큰 성공을 거둔다. 이어 <다호메이에서 (In Dahomey) (1902)> 등도 성공을 거둔다.
1890년대에는 수백 개의 뮤지컬 코미디가 브로드웨이 극장의 무대에 오른다. 1900년대 초에는 조지 M. 코헌, 거스 에드워즈, 존 월터 브래튼 등의 작곡가가 만든 뉴욕의 <틴 팬 앨리의 노래들 (Little Johnny Jones (1904)>, <45 Minutes from Broadway (1906)>, <George Washington Jr. (1906)>등이 무대에 오른다. 뉴욕의 뮤지컬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는 런던에 비해 대부분 상대적으로 짧았지만, 세계 시장에 우뚝 선다.
번역 뮤지컬이 활성화된다. P. G. 우드하우스, 가이 볼튼, 빅터 허버트 등 작가가 만든 프린세스 극장 쇼가 활발히 만들어진다. 현대적 뮤지컬 <점쟁이 (The Fortune Teller)>, <장난감 나라의 아기들 (Babies in Toyland)>, <내성적인 아가씨 (Mlle. Modiste)> 등도 제작된다. 1919년 8월, 연극 배우 노동 조합은 모든 프로페셔널 작품을 위한 표준 계약서를 요구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모든 극장이 문을 내리고 나서야 제작자들은 배우조합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인다.1920년대, 슈베르트 형제가 에를랑게 조합 (Erlanger syndicate)의 극장 대부분을 인수한다.
20세기 초 영화의 등장은 연극에 크나 큰 위협이 된다. 처음 무성 영화 시기에 영화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1910년 찰리 채플린과 같은 인물의 등장과 1920년대 말 재즈 싱어 같은 유성 영화가 개봉하면서 연극산업은 위기를 맞이한다. 극장도 영화가 연극무대를 흡수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추측도 나왔다.
뮤지컬 <시카코(CHICAGO)>의 배경인 1920년대 '광란의 20년대 (Roaring Twenties)'는 재즈와 춤, 술과 환락으로 뉴욕을 범죄와 부패 도시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뮤지컬연극계도 보드빌, 뮤직 홀과 다른 가벼운 엔터테인먼트의 요소들을 차용하여 플롯을 무시하고 대신 스타 배우들을 강조하고 대규모의 춤 장면과 대중적 노래들을 삽입한 대형 뮤지컬을 선보인다. 플로렌츠 지그펠트는 화려한 무곡, 호화스러운 세트, 정교한 의상 등이 담긴 레뷔 (시사 풍자의 익살극)를 제작한다. . 1920년대 제작된 <샐리 (Sally)>, <레이디 비 굿 (Lady Be Good)>, <서니 (Sunny)>, <노, 노, 나네트 (No, No, Nanette)>, <화니 페이스 (Funny Face)>등 대부분이 유쾌한 작품들이다. 대본은 사람들의 기억에 잘 남지 않았을지 몰라도, 조지 거슈윈, 콜 포터, 제롬 컨, 빈센트 유맨스 등이 작곡한 재즈 곡들은 꾸준히 사랑 받는다. 노엘 코워드, 지그문트 롬버그, 루돌프 프리멀 등은 빅터 허버트의 정신을 계승한다. 이런 식으로 연극은 영화의 발명 이후로도 계속 살아남았다.
1927년 12월 27일 지그텔트 극장에서 상연한 <쇼 보트 (Show Boat)>는 드라마 면에서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다. 대본과 음악의 통합으로 극적인 테마를 음악, 대화, 배경과 동작을 통해 전달한다. 이전 뮤지컬의 완성도를 훨씬 높였다. 쇼 보트는 572회 상연한다. 대공황 시기 이후, 브로드웨이 연극은 블록버스터 연극 <오클라호마! (Oklahoma!)>를 통해 황금시대를 연다. <오클라호마!>는 1943년 제작되어 무려 2,212회의 공연 기록을 세운다. 연이어 브로드웨이에서 흥행이 성공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브로드웨이 극장은 명실공히 연극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를 획득한다.
1920년대 유진 오닐의 등장과 함께 미국 극작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의 작품 <지평선 너머 (Beyond the Horizon)>, <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 <털달린 원숭이 (The Hairy Ape)>, <기묘한 막간극 (Strange Interlude)>, <상복이 어울리는 일렉트라 (Mourning Becomes Electra)> 등이 성공을 거둔다. 진지한 연극을 보고 싶어하는 관중을 극장으로 끌여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성공은 이후 엘머 라이스, 맥스웰 앤더슨, 로버트 E. 샤웃,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등의 메이저 작가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조지 카우프만, 모스 하트 등의 희극 극작가들이 데뷔할 수 있도록 길을 닦는다.
브로드웨이에서는 고전 리메이크도 인기를 얻는다. <햄릿 (Hamlet)>에서의 존 배리모어와 존 길구드, <시라노 (Cyrano de Bergerac)>의 호세 페레, <리처드 2세 (Richard II)>의 모리스 에번스, <오셀로 (Othello)>의 폴 로브슨 등이 당대 인기를 누린다.
브로드웨이 연극계는 1947년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눈에 띄는 작품을 시상하기 위한 토니상이 창설한다.